April 20, 2004

곱창과 닭발

간단한 모임이 있었는데, 사회생활을 하려면 고스톱도 칠 수 알아야 하고, 꼼장어, 닭발, 보신탕도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당연히 그런 음식들을 먹지 않는 나 때문에 나온 이야기였다. (나는 분명히 그러한 음식을 먹지 않노라고 얘기했건만) 모임의 장소는 꼼장어와 닭발, 곱창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으로 정해진 뒤였다.

어렸을 때 항상 아버지를 찾으러 화투판이 벌어진 동네 복덕방들을 헤메고 다녔던 나는 고스톱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꼼장어나 닭발처럼 붉은 양념을 잔뜩 바른 음식을 먹고난 다음날이면 설사를 하거나 하루 종일 아픈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려야 한다. 강아지 키우는 걸 좋아하지도 않지만, 길거리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그런 동물을 맛있다며 먹고 싶지도 않다.

살면서 지켜야 할 것도 많고 강요당하는 것도 많다. 그 중에는 합리적인 것도 있고 합리적이지 못한 것도 있다. 화투패와 꼼장어가 사회생활에 필요하다는 논리는 결국 다수가 하기 때문에 소수로서 존중받기 어렵다는 의미일거다. 사회적 소수는 어찌되었든 다수에 맞춰야 한다는 이치인 셈이다.

식욕이나 취향은 일종의 수평적 배열이다. 여기에는 우열도 없고 종속도 없다. 탕수육과 비빔밥을 어떤 절대가치로 환산할 수는 없다. 단지 순간순간의 내 미각과 요리한 이의 솜씨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호불호가 결정될 뿐이겠지. 이러한 수평적 배열은 현상에 따른 적절한 반응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맛 없으면 안 먹으면 되는 거고 맛있으면 곱배기를 시켜먹으면 그만이다. 맛 있는 음식에 점수를 매기거나 맛없는 요리를 만든 주방장을 깎아내리는 것은 요리대회에서나 합당한 일이다.

반면 회사의 경영 계획, 단기적인 광고 캠페인, 장기적인 CI, BI 프로젝트 등은 수직적 배열이다. 디자인의 예를 들어볼까? 메인 로고와 주요색상과 배색 등이 의뢰인과의 협의를 커쳐 최종적으로 승인되면 해당기업은 작은 명함과, 메모지, 우편봉투에서부터 거리의 옥외광고와 대형항공기의 색상까지 기본적인 로고와 색채배색을 근간으로 수형적(樹形的) 체계를 이루게 된다. 작은 볼펜까지도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진경이 풀어쓴 '천개의 고원(들뢰즈, 가타리 공저)' 해설서 - 노마디즘에는 탈주하는 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은 나름의 선을 가지고 있는데 이 선은 감시자의 눈에 의해 정해진 위치만을 오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밴담이 말한 바 있는 팬옵티콘(Panopticon)의 개념이 좀더 일반화, 객체화, 추상화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시자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선은 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일탈하는 선과 다르다. 일탈하는 선은 창조적이지 못 하다. 하지만 탈주하는 선은 창조적이며 배타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모든 선은 일탈과 탈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성공하는 것은 극소수이다.

내가 꼼장어, 보신탕을 먹지 않는 일이 탈주이거나 일탈일 수는 없다. 화투패를 만지지 않는 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러한 것은 일상의 소소한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문제시되거나 무시되어야 하는 걸까? 일탈과 탈주는 비슷한 궤도를 그리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로 인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무언가가 잉태된다. 가능성이 많은 시스템일수록 이러한 미묘한 차이가 존중받는 것은 아닐까? 음식에 대한 기호와 같이 지극히 수평적인 체계를, 사회적 예의 혹은 규범이라는 수직적 체계와 곧잘 혼동하는 것이 한국사회일까?

결국 꼼장어를 몇 조각 집어먹고 곱창은 겨우 하나를 씹어 넘겼다. 하지만 내게는 함께 나온 천원짜리 쟁반 국수가 너무나 맛있었다. 동치미 국물 또한 근래 먹어본 가운데 가장 일품이었다. 앞자리의 누군가가 끊임없이 곱창과 닭발을 권하지만 않았더라도 매우 만족스런 저녁식사가 되었겠지.

곱창과 닭발을 대할 때마다 그 녀석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다른 나라로 떠날 방도를 떠올려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비참하고 곤혹스런 일이다.

Posted by vizualizer at 11:35 PM | Comments (0) | Track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