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표정, 성대, 목소리

얼굴(face)은 기계다. 얼굴이 동작하면 표정(visage)이 나타난다. 얼굴은 정보가 없으나 표정에는 정보가 있다. 표정은 얼굴이 동작한 결과이다. 표정은 얼굴 없이 동작할 수 없고, 얼굴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의미 없음’ 또한 의미작용의 대상이라면 문제는 또 달라질 것이다). 이를테면 얼굴은 그 자체로서 감각([그]aisthêsis(αισθητική); 감각(작용))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표정을 통해서만 감각할 수 있다. 표정 또한 얼굴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얼굴 없는 표정은,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목소리는, 또한 모든 소리는 울림이다. 울림은 감각 가능한 상태가 되기 위해 조음기계(울대)에서 떨어져 나가야한다. 표정은 얼굴을 떠날 수 없지만, 목소리는 울대를 떠날 때에만 감각할 수 있다. 울대 안에 갇혀 있는 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학은, 혹은 기술([그]techné(τέχνη))은 얼굴이 표정 짓는 방법이다. 울대가 소리 내는 방법이다. 표정의 규칙은 얼굴에 들어 있지 않다. 소리의 규칙은 울대에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표정과 소리의 동작에는 분명히 규칙이 존재한다. 표정과 소리가 의미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는 의미이다. 표정과 소리의 동작은 시간축 위에서 일시적으로(temporal) 나타났다 사라진다. 동작은 기록이 필요하다.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규칙은 일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의미가 생성되는 방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자면 이러한 의미 생성의 방법은 언어학을 뛰어넘어야 한다. 언어학이 덜 추상적(abstract)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욱, 한참이나 더 추상적인 의미 조직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조립(assemblage)이다.]

의미들이 조립되지 않는다. 조립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조립하기 위한 규칙을 위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무언가를 부여한다. 반대로 나아갈 필요성이 생긴다. 무(無)에서 비롯된 무를 회피하기 위해 무에 이름을 붙인다. 무에서 무가 비롯되면 일자(一者)의 원리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원인으로서의 무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반면, 조립에 소비되는 것들은 무(無)이다.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음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조립이 중요한 이유는 의미를 조립하기 때문이 아니다. 조립을 통해 의미의 다양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언어학적 의미 조직의 방법은 제한되어 있다. 그 방법은 결국 언어학적 틀 안에서 사고하게 만든다. 계열(paradygm)과 통합(syntagm)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구성하면 통합과 계열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기술은 어디에 있는가? 기술은 다시 언어로 돌아가고 있는가? 인공언어 기반의 기술은 계열과 통합의 관계를 넘어섰다. 인공언어는 조립되고 있다. 인공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조립하기일 뿐이다. 기술이 조립(assemblage)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표정 없는 얼굴, 소리 나지 않는 울대이 있었던 자리에 표정이 생기고 목소리가 생기고 있다. 과거, 기계의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 사람은 스스로를 조립하여 표정을 짓고 소리를 울렸다. 기계의 자리에 다시 기계가 들어간다. 기계가 표정을 짓고 기계가 목소리를 낸다.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표정과 목소리를 조립한다.

- 얼굴과 표정은 구분될 수 있는가?
- 목소리와 울대는 구분될 수 있는가?
- 기술은 ‘조립하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