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04, 2004

그 녀석은 왜 62초만?

슬프로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은 내일이 아닌 타인의 일인 것처럼 구경하고 있는 또 한 명의 나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괜찮아. 난 잘해나갈 수 있을 거야. 마음을 더 내 몸 속 깊은 곳에 숨겨 놓자. 그러면 몸의 아픔도 마음의 아픔도 공포도 그 어떤 것도 느끼지 않게 될거야.

- 이카리 신지

문득 샤워를 하면서 생각을 해보았다. 왜 에반게리온은 62초만 움직일 수 있을까?
외부전원이 차단되면(플러그가 뽑히면) 녀석들은 62초가 지난 뒤 동작을 멈춰버린다. 생각해보면 생체병기라는 어마어마한 설정을 가진 녀석들이 전력 문제로 활동을 제한 당한다는 건 웃기지 않아?

중국인들은 변검이라는 기술을 통해 순식간에 얼굴에 붙어 있는 가면을 바꿔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한다. 그건 일종의 놀이이며 기술이다. 누군가는 변검이라는 이 놀이가 중국인의 대인관계를 잘 알려준다고 한 적이 있다. 필요한 순간마다 상대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빨리 필요에 따라 자신의 가면을 바꿔 쓴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가면, 아버지의 가면, 친구의 가면, 애인의 가면, 선배의 가면, 후배의 가면, 동료의 가면, 상사의 가면 같은 것들을 가지고 다니며 필요에 따라 바꿔 쓰는 거니까.

하지만 평생을 그리 살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일년 내내, 몇 십년 동안.
하루의 몇 시간은 그러한 가면을 쓰고 살지만 샤워를 하고 자리를 깔고 천장을 바라보며 누울 때 만큼은 그런 가면을 벗는다. 가면을 벗은 모습으로 하루 동안 자신이 바꿔치기한 가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내일은 어느 순간 어떤 가면을 쓰고 벗을 지 생각한다. 언젠가는 가면을 벗고 쉬어야 한다.

에바는 AT 필드를 쳐서 자신을 보호한다. 그건 물리적인 방벽이 아니라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며 결계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늘 누군가를 만나며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두는 공간적인 거리.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호감과 경계심이 묘한 균형을 이루는 감정의 라그랑주점(lagrangian point). 그런 긴장을 언제까지나 유지해야한다면 누구라도 폭주 :-) 할 수 밖에 없을거다. 그러니까 생체병기인 에바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AT 필드의 사용을 자제 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에바는 절정의 생체 병기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 일종의 갑옷의 형태로 그 힘을 제어한다. 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폭주할 테고 이미 조종사는 에바를 조종할 수 없을 테니까.

믿거나 말거나. ㅡ ㅡ;

Posted by vizualizer at 11:56 PM | Comments (0) | Track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