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9, 2005

블로거들에게 보내는 편지 - 모든 종류의 베낌에 관하여

블로그 관련 정보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지난 2003년 부터 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서 개인적인 일기, 공부를 위한 노트, 그리고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로 이용하고 있지요.
얼마전 황당한 일이 생겼습니다. 서버에 남겨진 referrers log를 확인하고 있었지요.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 기록은 제 홈페이지로 들어오기 직전에 클라이언트가 머물던 웹페이지의 주소를 기록해 줍니다. 이를 이용하면 제 홈페이지가 어디에 링크되어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지요. 그리고 얼마 전에 이상한 주소를 발견했습니다. 어떤 사이트와 그 하위 폴더에서 여러 번에 걸쳐 접근 기록이 있더군요. 단순히 링크려니 생각하고 방문해봤습니다. 참 어이가 없더군요.

3년 전쯤인가 영화를 보고 제가 직접 작성한 글이 떡하니 올라가 있더군요. 물론 출처 표시는 없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문장의 종결어미만이 일률적으로 바뀌어져 있더군요. 저는 존대말을 썼지만 그 글을 옮긴 분은 반말투로 바꾸었더군요. 처음에는 저도 이게 제 글인가 싶었지만 페이지를 자세히 비교해 보니 끝말을 바꾼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더군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한 두 번이 아닌 모양이구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글을 썼는데 글의 순서와 단어가 완전히 일치했으며, 참고로 삼은 링크 주소도 똑같고, 자료로 올린 이미지 파일의 크기와 내용마저 똑같으며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파일을 올린 서버의 주소마저 일치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베낄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용기가 있다면요.

그리고 3일 전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메일을 드리게 된 이유는 ***씨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향좌주 향우주(Turn left, turn right)라는 영화에 관련된 글 때문입니다. 2005년 5월 9일에 向左走. 向右走(Turn Left, Turn Right)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셨더군요. 그런데 글의 내용은 제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올려진 글에서 문장의 종결어미만 바뀐 채구요. 제 개인적 감상이나 그 글을 쓰기 위해 제가 모은 정보도 그대로더군요.

저는 그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습니다.
영화와 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수십군데의 사이트를 돌아다녔고
글에 언급된 음악 대부분을 찾아들어보았으며 글을 쓰기 위해서도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 글을 올리면서도 제가 쏟은 노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치 자신이 직접 작성한 글인양 글의 문장 끝부분만을 고쳐서 올리셨더군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제가 작성한 글의 수정본을 삭제하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 씨의 블로그에서 해당글이 삭제되었음을 메일을 통해 반드시 통보해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알린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은 목적을 잃고 말았습니다. 글을 쓰는 저 자신이 이 글을 쓰는 동안 마음이 바뀌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창피해져버렸으니까요.

제가 지금 듣고 있는 음악, 글을 쓰기 위해 이용하는 프로그램, 컴퓨터를 구동하는 OS,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군가 가져간 저 글의 소재가 된 영화까지. 모두가 주인이 있는 누군가의 저작물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아무런 댓가 없이 사용하고 있었구요.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 내 글을 몰래 가져갔다고 여기 저기 떠벌리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요? 맞습니다. 저는 사실 이 일을 떠벌리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거든요. 외국의 블로그 서비스 회사에 한글로 된 저작물의 보호를 위해 글삭제를 요청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베낀 글이라는 걸 증명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제가 떠벌려서 망신을 주려고 했었죠. 블로그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 글도 가져가지 않았을까라는 못된 기대를 하면서요. 하지만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건 마치 장물을 도둑맞은 장물아비 같은 심정이 되어버리는군요.

그래서 지금은 의미 없는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이미 항의하는 의미의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보내려고 했다면 벌써 보냈을테니까요. 결국 무언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은 없어보입니다. 그 분이나 저나 마찬가지로 말이죠. 제 블로그가 조금 더 유명한 블로그였다면 상황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아니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을까요? 이 글은 과연 몇 사람이나 읽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나는 좋은 사람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씁쓸한 밤입니다.
정말 진지하게, 글을 쓰시고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대체 어떻해야 하는 겁니까?

Posted by vizualizer at 10:39 PM | Comments (0) | TrackBack